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사카 전투 (문단 편집) == 겨울의 전투 ==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토벌을 명령했고, 다이묘들이 이에 호응해 무려 20만 명의 대군이 동원된다. 도요토미 측에서도 다이묘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대부분은 따르지 않았다.[* 아오키 카즈시게, 이토 나가자네 등이 도요토미 측에 참전했고 아오키는 겨울의 진에 참전했다가 도쿠가와 측의 압박에 여름의 진에는 참전하지 않고 은둔했으며, 이토는 특이하게 도자마 다이묘다보니 도요토미 측에 참전하고 여름의 진이 끝난 이후에도 다이묘로 존속할 수 있었다. 이토(伊東)가문은 후유가 국의 [[슈고 다이묘]]인테 전국시대에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에도 털리고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토요토미 가문에 서고도 에도막부에서 다이묘로 남아서 일본 제국 시절까지 화족으로 남은 셈이다.]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은 은고 다이묘들도 마찬가지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군량을 제공한 정도였고[* 사실 제공했다기에도 어폐가 있다. 오사카 성에 비축된 마사노리 명의의 군량 8만 석을 쓰는 것을 묵인한 정도다.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 의해 연금 중이었기 때문에 따로 군량을 보낼 처지기 못됐다.], 이것만으로도 이에야스에게 찍혀서 개역당하게 된다. 심지어 화의를 주선했던 가타기리 가츠모토도 토벌군에 합류했다. 다만 이는 화의에 실패하자 도요토미 측에서 그를 배신자로 몰아붙인 것 때문이기도 하고 히데요리의 목숨만은 살리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도요토미 측은 많은 돈을 풀어 [[로닌]][*牢人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떠돌이 무사 [[로닌]](浪人)이 아니라,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처럼 영토와 지위를 잃고 몰락한 무사 계급을 말한다.]들을 불러모은다.[* 예를 들면 쿠도산에 유폐돼 있던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히데요리는 황금 200매와 은 30관을 보낸다. 현재 시가로 10억 엔, 약 100억 원의 돈이다.] 그 대부분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서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전했다. 이제까지 도요토미 가문이 쌓아놓았던 막대한 부가 있었기에 1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중 대표적인 자가 [[쵸소카베 모리치카]], [[고토 마타베에]], [[모리 카츠나가]], [[아카시 테루즈미]], 그리고 이 전투로 전설이 된 [[사나다 노부시게]]였다. 이들을 묶어 [[오사카 오인중]](五人衆)이라 부른다. 이 오인중 외에도 [[스스키다 카네스케]], [[오타니 요시하루]], [[반 나오유키]] 등의 이름난 무사들이 모였다. 도요토미군은 병력이야 많이 모였지만 [[유리몸|문제는 이에야스가 이끄는 대군의 절반 정도였고 그 내실도 그리 좋지 않았다.]] 로닌들이 주력이라는 건 전투에 능한 베테랑 병사들이라는 장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들이 돈받고 싸우는 용병들이나 마찬가지라서 잘 뭉치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특히 오사카 오인중을 뺀 로닌들은 실전에서는 최고이지만 군략에서는 무능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측의 결정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바로 수뇌부의 무능이었다. 당시 히데요리는 22살로 장성했지만 산전수전 다겪은 노련한 아버지 히데요시와 달리 아무런 경험이 없고 그저 편하게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일 뿐이었다. 거기다 병력을 지휘하는 장군들도 문제였는데 오사카 오인중을 제외하면 주요 장군들인 오노 하루나가, 하루나가의 아우인 하루후사, 기무라 시게나리 등 히데요리의 가신들이 실전 경험이 없어 전쟁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여기에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도노의 간섭이 지나칠 정도로 심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지원을 거부하는 이유로 요도도노가 대장이라는 걸 들었다.] 요도도노는 아들처럼 전쟁을 모르는데도 발언권만 세서 트롤링에 가까운 결과를 낳게 되었으며, 총지휘관이라는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도노에게 휘둘려 장성하다보니 유약하고 줏대가 없이 커버렸다. 사실 요도도노의 이런 행위가 가장 큰 해악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는데 어린자식을 내세워 권력을 잡으면 자식이 나이가 차면 필연적으로 권력교체가 이뤄져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교체는 순순히 자식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 조선시대만 해도 역대 [[수렴청정]]들이 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양되었고 반대로 끝까지 권력욕을 못 버린 [[흥선대원군]]은 추하게 물러나야 했다.] 이때문에 큰 돈을 들여 스카웃 해온 오사카 오인중을 비롯한 장군들이 세운 계책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는 이에야스가 오기 전에 수성전을 하기 보다 선공을 걸어 히데요리가 친정에 나서 이에야스가 교토에 있으니 후시미 성을 점령 후 니조성을 점령하여 이에야스 처단 후 오우미를 차지, 교두보를 끓어 이에야스의 부대를 분단시켜 도쿠가와 가문에 맞서자고 건의한다. 하지만 요도도노를 비롯한 수뇌부는 히데요리의 위험성과 병력이 열세이고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 성의 방어력과 많은 식량에 의지했던 수뇌부는 이를 듣지 않았고, 특히 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가 원했던 히데요리의 친정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도도노도 히데요리의 안전을 우려하여 친정을 결사반대하였기에 결론은 농성이었다. 사실 토요토미 가문 입장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의 건의가 최상책이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주력인 로닌들은 과거의 경제력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유인이 있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용병에 가까운 집단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끌 수록 막대한 재정을 잡아먹는 돈 먹는 하마가 될 수 밖에는 없는 존재들이었기에 잃더라도 도쿠가와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1석2조이다. 그리고 공세에 실패하더라도 이후 농성으로 들어가면 된다. 게다가 전체적인 전력이 열세에 있는 한, 후시미, 오우미등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관동에서 먼 거리를 행군하여 피로했을 도쿠가와측을 상대로 선제 기습 공격이 가장 좋은 전략이 되기에 충분했고 기습이 아니고 전면전이라 해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도요토미 군이 피로가 덜 하기에 피해를 입히기에도 충분했다. 당시 [[오사카 성]]의 [[방어력]]은 일본 최강이었다. 원래 [[일본의 성]]은 [[센고쿠 시대]]의 영향으로 성은 최후의 농성 수단이었기에 [[아시아]]에서도 [[방어력]]이 최고로 손꼽힌다. [[대포]]가 아니면 [[고대]], [[중세]]의 공성법으론 함락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이다. [[울산성 전투]]에서도 일본식 성을 조명 연합군이 함락시키는데 실패했다. 이는 중국, 한국식 성과는 다른 축조방식, 설계사상에 의한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기본적으로 성 내부의 백성을 보호하기위해 설계되어 대부분 마을이나 읍을 둘러싸는 형태로 축조되었다. 또한 완벽히 군사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산성이나 요새들 역시 대부분 성 자체의 구조가 뛰어나기보단 유리한 지형에 축조하여 자연지형에 기대는 측면이 컸다. 그러나 일본의 성은 자연지형도 활용하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두껍고 높은 오로지 공성전에 대한 방어만을 고려해서 축조하였기에 그 방어력이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진이 많은 열도인지라 내진성도 뛰어났다. 애초부터 [[혼간지 켄뇨|혼간지]]가 노부나가에 맞서 10년이나 버텼고, 노부나가도 정공법으로는 함락시키지 못해서 결국 화의를 맺어 퇴거시켜야 했던 곳이었다. 특히 오사카 성의 서쪽은 바다, 동쪽은 히라노 강, 북쪽은 요도가와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한 오사카 성은 외측의 성벽(12.7킬로) 에 약 8킬로 미터에 걸쳐 소가마에보리라고 불리는 깊이 11미터, 폭이 30미터가 넘는 호리([[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엇보다 히데요리가 막대한 자금으로 식량도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값을 주고 싸그리 사들여, 10만 명의 군사와 성 안의 주민이 몇 년 동안은 농성전이 가능하도록 넉넉히 비축했다. 이 때문에 쳐들어온 이에야스의 군대는 함락시키는데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으며 장기전에 대한 대비도 없었기에 식량까지 부족해서 고생해야 했다. 다만 성의 남동부는 계곡을 이용한 방어벽이라서 이곳만은 북쪽과 서쪽에 비해 다른 곳에 비해 방어에 취약했다. 그래서 도요토미 군은 남측에 외성을 지어 전초기지를 만들었으며 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도 연계를 고려해 남동부의 성 밖 지형중 가장 고지가 높은 곳에 폭 40미터에 깊이 10미터의 해자와 저격용 [[토치카]] 시설과 망루와 토루 등 각종 방어 시설을 갖춘 둘레 총 길이 1.2킬로 규모의 훗날 [[사나다마루]]라고 불리우는 데마루(出丸,작은 외성)를 만든다. 적이 남쪽에서 공격해 들어올 경우, 사나다마루에서 측면에서 협공할 의도였다. 그렇게 되면 적은 정면과 우측면에서 총알 세례를 받게 되며, 사나다마루는 높은 고지에 만들어진 외성이기에 어느 외성보다 빠르게 도쿠가와군을 식별하기 용이하였고 도쿠가와군이 아무리 몰래 성벽에 접근하려해도 사나다마루가 건재한 이상 들키는건 100%였기에 도쿠가와 군은 우선 사나다마루부터 처치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 [[파일:external/jyouhouiroiro.com/oosakajyousanadamaru.png]] || || 1610년경의 [[오사카 성]] || || [[파일:external/www.j-cast.com/tv_20151228130435.jpg]] || || [[일본방송협회|NHK]]에서 재현한 사나다마루 상상도[* [[역사비화 히스토리아|歴史秘話ヒストリア]]スペシャル▽徹底解明! 真田丸 - 地中残幻城 20160106 水曜日 2200 [[NHK 종합 텔레비전|NHK 総合]] [[http://newskei.com/?p=4227|#]]] || 1614년 11월 19일, 첫 전투가 시작된다. 이에야스는 일단 오사카 외부에 있는 도요토미 가문의 외성들을 공략했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인 가타키리 카츠모토와 이세 도도 가문의 도도 다카토라가 선봉에 나서 공격해왔다. 하치스카 요시시게, 아사노 나가아키라, 이케다 타다카츠 등이 오사카 성 외부에 있던 에다가사키 성을 함락. 일주일 후인 26일에는 시기노, 이마후쿠 전투가 벌어졌고 역시 도쿠가와 측이 승리한다. 여기서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나오에 카네츠구]]가 맹활약을 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때 서군으로 감봉(영지 일부 몰수)당했으니 여기서 충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으며 여기서도 전공이 빈약했다면 가이에키 조치 당해 일개 평민이 되는 꼴이었다.] 3일 후에도 전투가 벌어졌고 역시 도쿠가와군의 승리였다. 이때 도요토미군이 보여준 졸전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창의 명수라 불린 와타나베 타다쓰는 우에스기군을 공격하다가 조총으로 반격받자 병력이 훨씬 많았음에도 '''[[빤스런|달아나버렸다.]]''' 그것도 오노 하루나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오죽하면 우에스기군도 처음에는 도요토미군이 왜 달아났는지 이해를 못했을 정도. 또한 바쿠로부치 요새를 지키던 [[스스키다 카네스케]][* 괴물인 히히를 퇴치했다는 전설로 유명한 이와미 쥬타로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는 도쿠가와군에게 패하여 요새를 뺏겼는데 패한 이유가 어처구니없게도 유곽에서 유녀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도쿠가와군이 공격하는 줄 몰랐다고.(...) 이렇게 해서 외부의 성채들이 모두 함락당하는 바람에, 이제 오사카 성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도쿠가와군은 드디어 오사카 성 남쪽으로 접근한다. 12월 4일 도쿠가와 측인 마에다 도시츠네[* [[마에다 토시이에]]의 차남. 형인 [[마에다 토시나가]]가 세상을 떠나자 가독을 상속.]와 마츠다이라 타다나오가 공격해왔다. 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는 먼저 평원에서 적군을 도발, 사나다마루로 유인해서 집중사격을 했고, 단 하루 만에 도쿠가와군은 사상자가 1만 명이 넘어 대패를 겪고 패퇴하였으며 도요토미군은 대승을 거둔다. 5천 명의 병사로 거둔 전설적인 승리였다. 성벽의 외측은 해자로 둘러싸여져 접근하지 못하거나 접근하려고 하면 사나다마루에서 견제할 부대가 오기에 도쿠가와군의 공격 목표는 사나다마루로 집중됐다. 연이은 공격이 계속됐지만 사나다마루는 높은 고지에 있는 요새에다가 조총부대가 다수 포진되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며 사나다마루는 보급로도 좋았다. 그러다가 사나다마루 후방에서 실수로 화약이 폭발했는데 이를 첩자의 신호로 착각한 도쿠가와군이 총공격을 개시해버렸으나, 노부시게는 되려 몰려오는 도쿠가와 군에게 피해를 입히기 좋은 기회라며 이를 이용해 공격을 모두 버텨냈고 큰 피해를 입혔다. 이 공성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해자가 시체로 메워질 정도였고 각 군에서 셀 수 없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로도 도쿠가와군은 계속해서 공격했으나 함락할 수가 없었고 지루한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오사카 성을 포위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이에야스군은 사나다마루와 성 밖을 두룬 외측의 해자 때문에 성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하게 길어진 농성전으로, 가지고 온 군량미와 땔감이 떨어져서 병사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려 고전해야 했다. 갑옷과 마구를 담아왔던 상자를 땔감으로 태워 추위를 버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전략을 바꾸어 도요토미 측을 심리적으로 동요시킬 작전을 펼친다. 땅굴을 파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고[* 이는 병사들이 도쿠가와 군이 땅굴로 침공해한다는 불안감과 이들이 발밑에서 나타날까봐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어느 날 밤은 병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게 하여 야습이 일어난 것처럼 해서 성 내의 사람들이 잠을 못자고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밤낮으로 성 밖에서 자체생산한 300여 문의 [[대포]]로 [[천수각]]을 향해 위협 사격을 퍼부었다. 당시 [[일본]]에서 쓰인 대포는 [[유럽]]이나 [[중국]], [[조선]]에 비교하면 안쓰러울 수준이었으나[* 오오즈츠라고 해서 [[조총]]의 사이즈를 키운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에야스는 유럽 [[상인]]들로부터 유럽산 대형 대포인 [[컬버린]]을 몇 문 도입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컬버린을 가져와 [[포탄]] 중 한 발이 16일에 우연히 수뇌부가 있던 [[천수각]]에 명중하여, 요도도노의 시녀 한 명이 그 자리에서 포탄에 맞아 즉사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한 발이 요도도노의 [[이마]]를 다치게 하고 주위에 있던 [[시녀]]들 7, 8명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으로 도요토미군 수뇌부는 도쿠가와 군의 대포의 위력에 크게 동요 및 오사카 성의 방어가 뚫린다는 공포감을 심어, 요도도노는 이때의 충격으로 정신적인 [[노이로제]] 상태에 빠졌다. 오사카 성의 방어가 삼엄해진 것을 보고 심리전이 성공한 것을 알게 된 도쿠가와 측은 화의를 제의하고, 요도도노는 오사카 오인중을 비롯한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의를 진행된다. 화의 회의 중 도쿠가와 측에서 낭인들 해체 및 사나다마루를 비롯한 해자 철거를 한다면 병력을 물리겠다는 조건이 화의 조건이라 하였고 협상을 진행한 요도도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19일에 겨울의 전투는 끝이 났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첫 전투가 시작되고 다음 날인 11월 20일에 도쿠가와 측은 오사카 성의 방어가 철통인 것을 알고 그날부터 사신을 보내 화의를 제의했다고 한다. 또, 12월 15일에는 요도도노가 자신이 직접 [[인질]]이 되어 전투를 멈추려고 했다고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